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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일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23-09-08 (금) 10:50 조회 : 40
내 눈앞의 살구나무

“아직은 둘 중에 누가 / 그의 미소를 머금게 될지 / 모른다 하자 // ‘신은 없다’ 한다 하여 / 우자愚者라고 말자 // ‘신은 있다’ 한다 하여 / 현자賢者라고도 말자 // 머지않아 그날이 와 // 마지막 호흡 놓았을 때 / 아무 미소 없다면 같은 자리일 것 / 만일, 신의 미소가 있다면? //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네.” - 원제근 <신의 미소>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모르는 노예’가 있답니다. 인간이라지요. 그 노예가. 얼핏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경구지만, 실은 유명한 철학자 니체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더랍니다. ‘일’과 ‘쉼’ 의 저울이 균형을 잃은 ‘모던-현대 사회’의 구조에 대한 쓴소리입니다. 공장에서 하루 종일 나사만 조이는 ‘찰리채플린’은 공장을 나와서도 손에 든 스패너를 놓지 못합니다. 보이는 것마다 조여버려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강박, 그게 <모던타임즈>가 차려 놓은 ‘노예의 제단’입니다. ‘바쁨’을 자랑처럼 아는 건 그때부터 생겨 먹은 걸 겁니다. 

포스트 모던의 제사장들은 더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제단을 진화시켰지요. 얼마나 감쪽같던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모르는 노예’들이 하루 종일 제단의 향을 피웁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처럼 기계가 공장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기계가 만든 기계’가 인간의 손바닥에 터를 잡은 겁니다. 이제는 ‘일’뿐 아니라 ‘쉼’까지도 ‘노예의 제단’이 되었습니다. 꿀떡, 일상의 모든 ‘짬’을 제물로 받아먹는 인간의 손바닥-그 보좌에 아이폰이 앉아 있습니다. 깜박, 두고 온 스마트폰을 다시 손에 들기 전까지는 용서받지 못한 죄인처럼 좌불안석입니다. 

‘구하면 얻고, 찾는 자가 찾고, 두드리면 열리는’ 제단 앞에서 기꺼이 노예가 되려는, 거기서 ‘쉼-안식’을 누리려는 제의적 열심에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립니다. ‘아이폰의 제단’뿐일까요. 인간을 노예 삼으려는 제단이 그뿐이라면 ‘하늘 가는 길’이 이렇게 어둡지 않을 겁니다. 어느 시대나 만신전은 차려 있었겠지만, 이제는 만신전이 따로 없는 세상입니다. ‘모던-포스트 모던’이 차려 놓은 밥상이 다 ‘저승밥’이 되었습니다. 신을 부르다 기어이 신이 되어 제힘으로 선악과를 심습니다. 동산의 중앙을 제 손에 두고 삽니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예레미야 1장 11절 a).” 격변의 시대, ‘아나돗의 제사장’ 노릇을 하며 살았던 예레미야는 ‘무엇’을 ‘보며’ 살았을까요. 그의 눈에 펼쳐진 세상은 에덴처럼 아름다웠을까요? 사자가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 넣어도 물지 않는 세상을 보았을까요?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예레미야 1장 11절 b).” 그깟 살구나무(아몬드나무) 가지가 뭐 대수랍니까. 그깟 걸 본다고 뭔 세상이 달라질까요. 하루에 다섯 알, 머리 좋아지는 열매를 세는 것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입니다.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예레미야 1장 12절 a).” 아이쿠, 잘못 본 게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보았다네요. 뭘 제대로 본 걸까요. “이것은 내 말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예레미야 1장 12절 b).” 하나님께서 ‘말놀이’를 하고  계십니다. “그 ‘만두’ 맛있니?”-“그럴 ‘만두’ 하지.” 같은 ‘말놀이’ 말입니다. ‘살구나무’의 히브리 낱말은 ‘샤케드’로 발음하고 ‘지켜보다’라는 낱말은 ‘쇼케드’로 발음합니다. 물론 자음은 똑같은 글자지요. ‘무얼 보았느냐-샤케드(살구나무)를 보았습니다’ ‘잘 봤다-내가 내 말을 쇼케드(지켜), 그대로 이룰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어김없이 ‘지키’실 겁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끓는 가마를 보나이다(예레미야 1장 13절).”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봅니다. 재앙의 가마솥입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기울어진 게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기울어진 가마솥입니다. ‘이쪽-유다 모든 성읍’을 향해 ‘끓는 가마’가 기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도 어김이 없을 겁니다. ‘끓는 가마’가 다 기울어지고 재앙이 유다 모든 성읍을 덮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보실 작정이십니다. 

“내가 내 백성을 심판하여 벌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들의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 섬김으로 범죄하였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장 16절).” 정신이 번쩍 드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모르는 노예’는 저 ‘북쪽’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줄줄 외고 사는 ‘남쪽’에는 ‘끓는 가마’가 쏟아질 일 없다고 철떡 같이 믿고 살았습니다.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아직은 둘 중에 누가 / 그의 미소를 머금게 될지 / 모른다 하자” 는 시인의 말이 옳습니다. 과연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음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제대로 보고 살아야겠습니다.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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