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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밤이 선생이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9-09-24 (화) 10:34 조회 : 42
우리의 사명은 아픔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책이 ‘좋다’고 말하고 싶은데, 가볍게 들릴까 
봐 염려가 됩니다. ‘좋다’라는 말에 상당한 의미들을 가득 담아 모두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참으로 ‘좋다’고 말입니다. 표지 그림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캄캄한 방에서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크기를 보아하니 흰 것은 캔버스인 것도 같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말입니다.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 그는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마치 펜을 들고 글을 쓰면 어둠이 물러가고, 잠시라도 펜을 놓으면 이 세상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이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손은 쉬지 않습니다. 뒷모습에서는 비장함과 거룩한 사명감이 전해집니다.

저는 이 책의 표지를 보면 구약에 나오는 아말렉
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떠오릅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팔이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그 장면 말입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고 돕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아론과 훌이지요. 그는 우리에게 아론과 훌이 되어 내 손을 붙잡아 달라고 말하는 듯도 하고, 내가 너희들의 손을 잡아줄 테니 힘을 내라고 하는 것도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버텨줄 테니 포기하지 말고 같이 가자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2018년에 작고하신 故 황현산 
선생님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입니다. 황현산, 시대의 스승이라 불리는 이 지적인 할아버지는 온통 자기 지식이 이 세계에 어떻게 보탬이 될 수 있을까 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나는 내 글에 탁월한 경륜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오직 저 꿈이 잊히거나 군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재주를 바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사방 천지에 멘토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깔렸습니다. 위로의 말들이 차고도 넘칩니다. 그러나 부끄러움과 비통함 없는 충고와 조언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책임감과 부채의식 없는 지식인은 차고 넘치는 말들 위에 허망한 말 하나를 보탤 뿐입니다. 그가 시대의 스승으로 불리는 이유는 앞장서서 먼저 걸어가는 글, 어른으로서 손을 내미는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신이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쓰고, 가방끈
이 길고, 노래를 잘 하고, 그림을 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들을 ‘자유롭게’ 누리고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자유를 위해 누군가가 바친 피와 눈물의 대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故 황현산 작가가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기독교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그가 이야기한 시인의 시대적 사명이 기독교인의 사명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인들의 선생님이었던 그는 시인의 시대적 사명을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가장 먼저 느끼고, 가장 늦게까지 슬퍼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비단 시인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시
대의 슬픔과 상처를 글로 쓰는 사람들에 대한 정의이기도 합니다. 2009년 용산 참사 이후에 시인, 소설가, 비평가 192인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작가 선언’을 발표하고, 참사 현장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하면서 각종 매체에 릴레이 기고를 시작했을 때 황현산 선생님은 이런 칼럼을 쓰셨습니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시대의 아픔을 잊어버리지 않고 오래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작가들이고 그게 작가들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어떤 사람에게 현재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겠지만, 또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 유신시대의 압제가, 한국동란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의 몸부림이, 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 모두 현재에 속한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분명 기독교인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무뎌지고 타협하고 싶을 때마다 이 책을 꺼내 읽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무엇이며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서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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