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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일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9-04-15 (월) 09:34 조회 : 26

그림일기

Ⅰ. 생각해 본다
기숙학교를 다니는 아들에게 가끔 예쁜 수첩을 사서 좋아하는 간식 몇 가지와 함께 보내 주곤 합니다. 외박하는 주말이면 집에 온 아들은 수첩의 용도를 설명해 줍니다. 일과를 정리하는 수첩, 시를 필사하는 수첩, 감정과 생각을 적어 두는 수첩, 의식의 흐름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수첩이 있고, 몇 권은 생일을 맞았거나, 고마운 친구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글로 쓴 내용은 잘 보여주지 않지만 그림은 선뜻 보여주며 반응을 궁금해 합니다. 검정색 펜으로 낙서하듯 그린 그림은 꽤나 정교하고 볼거리가 많습니다.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모두 선으로 이어져 뒤섞여 있는 그림, 그린 이의 말대로 의식의 흐름 기법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어폰, 고양이, 모자, 연필깎이, 컵 같은 주변 사물들이 숨은 그림처럼 곳곳에 박혀 있고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일상의 감정들을 읽을 수 있는 기호들도 보입니다. 글자, 숫자, 무늬까지 동원 되어 있어서 종합 예술을 대하는 기분이랄까요.

아무래도 반복되는 표현 기법에 관심이 갑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여기 저기 보이면 눈물인가해서 걱정이 되고, 까맣게 칠한 면들이 보이면 출구가 없는 답답함으로 힘들었을 시간들이 안쓰럽습니다. 반면에 익살스러운 표정이나 행복을 상징하는 패턴을 발견하면 안심이 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잠시 앉아서 그려보는 감정도 이렇게 복잡한데 매일 매일 삶을 그림으로 기록하면 얼마나 다양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될지 궁금합니다. 산다는 것이 늘 비슷해 보여도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는 걸 알게 되겠고, 그날의 괴로움이 있듯이 그날의 행복 또한 반드시 있음을 깨닫고 여유로워지지 않을까요.

Ⅱ. 감상해 본다
아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떠오른 화가가 있습니다.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 스위스). 오래 전에 화집을 갖고 싶어서 헌책방에 들렀는데, 제값 주고는 살 수 없는 가격이니 취향 무시하고 있는 물건 중에 고르는 게 상책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일본어 가타가나로 ‘클레’라고 표기된 두꺼운 화집을 발견하고는 마음에 들어 나름 큰돈을 지불하고 구입했습니다. 일본어와 독일어뿐인 화집이었지만 그림이 주는 메시지로 만족했던 순간이었지요. 쉽고 단순하고 자유로운 표현과 틀에 박히지 않은 전달 방식이 좋았습니다. 다양한 선들, 그 선으로 구분된 면을 채운 예쁜 색들, 세련되게 배치된 글씨와 기호들은 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로 인정받는 클레는 스위스에서 나고, 죽었지만 국적은 독일입니다. 음악 학교 출신인 어머니와 성악 전공자이자 음악교사이셨던 아버지 아래서 클레는 7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실력 있는 연주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음악과 미술에 재능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그리스어와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산책과 스케치를 좋아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아내 또한 피아니스트여서 그의 삶과 그림은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악보와 같은 치밀한 구성력과 리듬감은 점, 선, 면, 색채를 통해 그림 속에서 조화롭게 드러납니다.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파’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지만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여행한 이후 클레는 색채에 눈을 뜨게 됩니다. 작품 백여 점이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 찍혀 몰수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스위스로 건너가 대중적으로 인정받으며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피부경색증이라는 불치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클레는 9천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그림을 그렸는데, 놀랍게도 1254점은 그가 죽던 해인 1940년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클레는 굳어가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천천히 계속
그렸으며 일기 같은 그림을 매일 그리기를 소망했습니다.

Ⅲ. 읽어 본다
우체국에 가서 아들에게 택배를 보낼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편지입니다. 간단한 안부와 가족들의 일상을 전하고, 좋은 문장이나 시를 모아두었다가 적어보내기도 합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아들이 봄과 함께 새 학년을 시작하러 떠날 때 주고 싶은 시가 있어 읽어 봅니다.

두 번은 없다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 지라도


정호경(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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