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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실낙원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9-04-15 (월) 09:16 조회 : 23
17세기 눈먼 작가에게서 믿음과 자유를 배우라

단테의 <신곡>과 밀턴의 <실낙원>은 공통점이 있
습니다. 두 작품 모두 천국과 지옥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대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였으며, 고전이라고 불리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단, <신곡>은 14세기 가톨릭의 세계관 속에서, <실낙원>은 17세기 개신교의 세계관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옥’의 유무가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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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 존밀 턴 지음 / 문학동네>

어느 고전 문학이나 그렇듯이 소문은 익히 들어 
익숙해도 아마 두 책을 완역본으로 읽어보신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교회 문화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렸던 천국과 지옥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머릿속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단테와 밀턴의 손끝에서 구체화된 것입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가 강렬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이 담겨있다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프로테스탄트의 후예들이니, 밀턴의 <실낙
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겠습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존 밀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적이고 극적인 상상력의 정수가 셰익스피어라면, 밀턴은 열광적이고 명상적인 상상력의 거대한 저장고이다.”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들은 ‘우연히’ 지하 창고를 내려갔다가 케케묵은 아버지의 노트를 발견합니다. 먼지를 툭툭 털고 펼쳐보는 주인공의 동공이 활짝 열리지요. 그 안에는 지금의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 줄 지혜와 세상이 깜짝 놀랄 비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낙원>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이 꼭 이랬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책이었습니다. 몇 년간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눈길도 안 주다가 어느 날 그냥 문득 펼쳤는데 안에서 별천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그 이전의 일들은 물론이고, 성경의 각 절 사이사이 숨겨져 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존 밀턴은 실명한 상태에서 이 책을 썼는데, 마치 사탄이 그의 눈을 빼앗아 간 대가로 자기 이야기를 속삭여주기라도 한 것처럼, <실낙원> 속 사탄의 고뇌와 번민은 이제껏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냐는 의심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
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선과 은밀하고 깊은 곳에서 끄집어 낸 그들의 욕망도 잘 널어놓았습니다. 그것들은 지금 우리의 욕망과도 너무나 닮았기에 책을 읽는 내내 ‘아, 존 밀턴, 이 아저씨 대단하네!’를 연발했습니다. 

존 밀턴의 <실낙원>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그의 욕망과 절망에 대한 우리의 공감대가 아무리 커진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는 어떠한 손상도 없습니다. 아무리 사탄이 힘이 세고 장엄하고 위엄 있고 말발이 세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섭리는 너무나 압도적으로 크고 높은 것이어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밀턴에게는 두려움이 없었기에 마음껏 사탄의 욕망과 매력을 풀어냈습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자유분방한 것은 아닙니다. 청
교도주의자 밀턴에게 전통적인 교리는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이 책은 당대 신학을 시로 풀어낸 것이 아닐까, 당대의 기독교 변증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전통 교리에 충실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선을 밟고, 선 바깥의 이야기를 끌어오는 것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작가적 호기심이나 금기를 깨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신뢰 안에서 가능했음을 보게 됩니다. 반대로, 작금의 우리들의 교회는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되묻게 됩니다.


서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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