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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일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9-01-16 (수) 15:18 조회 : 62

바닥을 치는 일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한밤중에 깨어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진짜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구나 싶을 때
바닥은 다시 천길만길의 굴욕을 들이민다는 것을
굴욕은 굴욕답게 캄캄하게 더듬어온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어보지만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수운 게 정말 아니다
그는 바닥의 실체에 대해
오래전부터 골똘히 생각해온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워진 것도 아니지만
바닥이란 무엇인가
규정하자면,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 강연호 <바닥>

‘평평하게 넓이를 이룬 면’ 사전은 ‘바닥’이란 말의 기본의미를 그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이를테면 방바닥이나 욕실 바닥 같은. 혹은 물체의 평평한 밑면을 두고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양말 바닥이나 신발 바닥 같은. 한편으로는 일정한 지역이나 장소 혹은 영역을 일컫기도 합니다. ‘이 바닥 물을 먹은 지가 얼마’라는 말처럼. 근래에는 주가가 크게 내려서 낮은 수준에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로도 쓰이는가 봅니다. 이 말이 속담이나 관용구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바닥을 쳤다’는 말이나 ‘바닥다 보았다’는 말처럼.

금을 캐내는 광산을 금광(金鑛)이라 하지요. 광부들이 금을 캐고 또 캐다가 더 이상 금이 나오지 않을 때 ‘바닥 다 보았다’고 했다는군요. ‘바닥 다 보았다’는 말은 그로부터 유래된 속담이랍니다. 바닥 본 금광에서는 갖은 곡괭이질이 다 허사지요.

그나마 광부들은 그간 얻은 것들을 들고 자리를 뜨면 될 터지만, 바닥보인 금광은 더 이상의 쓸모를 갖기 어렵습니다. 부지런했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길 것이고, 산 중을 요란케 했던 기대와 소망도 거두어질 것이 뻔합니다. 어줍게 말하자면 ‘바닥을 친다’는 게 그런 것이겠지요.사람살이도 ‘바닥’을 ‘칠’ 때가 있어요. ‘더는 밀려 내려갈 곳이 없어’,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생각은 실체가 묘연한 것이기도 하여, 그 ‘바닥’을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찬 물 한 사발 벌컥 들이마신 개운함이 갈증을 다 씻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생각의 찬물 한 사발은 이 바닥의 갈증을 한 사발만큼도 씻어내지 못할 겁니다. ‘바닥’이 들이미는 ‘천길만길의 굴욕’이란 생각, 스스로를 달래는 것으로 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바닥’이란 무엇일까, 바닥의 실체에 대해 골똘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치고 일어날 소망의 성소일까, 아주 엎드러져 일어서질 못할 절망의 무덤일까.’ 시인은 매우 현실 적이고 일반적인 규정을 달아 놓습니다.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라 말입니다. 가장 수월한 선택입니다. ‘털썩 주저앉기’란 일견 소망과 절망을 덧없게 하는 일체의 자유하는 비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착시라 할까요. 그런 까닭에서겠지요. 시인은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이라는 풀이와 경고를 달아둡니다.

‘바닥’이 더없이 고마웠던 개인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어린 전도사 시절, 물에 빠진 아이 하나를 보고 달려들어 둘이 같이 숨을 꼴딱 거릴 때였지요. 그 경황없는 중에 발 뻗을 생각이 들었다던가요. 쭉 뻗은 발 아래로 ‘바닥’이 닿더군요. 그 ‘바닥’을 딛고 뭍으로 아이를 밀어내 둘 다 살았다지요. 털썩 주저앉으라고 있는 ‘바닥’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하여 예수 지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간 여인의 이야기가 다시 새롭습니다.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중해 연안의 이방 땅에 살던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 말입니다. 예수께 나아온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내 놓은 첫 마디는 ‘바닥 친 인생’의 절절함이 묻어난 청원이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여인의 간절함을 비껴섭니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 개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복음 15장 26절).” ‘바닥’ 인생이라해서 사람을 개에 빗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이방인을 개 취급하는)유대인’ 예수라 해도 말입니다. ‘바닥’을 털고 일어서자고 좌고우면 없이 찾아 왔습니다. 헌데, 저분마저 나를 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게 만들고 맙니다.

개 취급받는 천길만길 굴욕은 옳다 할 것이 아니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박차고 일어서야 마땅해 보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바닥’은 고개를 젓지 않고 끄덕입니다. “옳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청원. “그렇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는 저 ‘바닥’의 여인에게서 ‘믿음’을 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이제 예수께서 이 여인의 ‘바닥’이 돼 주시려는 모양입니다. 예수께서 짊어질 십자가도 실은 바닥을 치는 일이었기 때문일까요. 바닥 치는 게 뭔지, 제대로 보고 배우라는 이야기 같습니다.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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