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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블레스 유
Ⅰ. 생각해 본다
딸 셋 아들 하나, 사남매 중 맏이인 나는 70년생 치고 남아선호 사상에 피해를 본 기억이 거의 없으며, 어쩌면 남녀 구분보다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씩씩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문난 울보에다 몸이 약하고 내성적이었지만 할아버지에게 욕먹을 만큼 도도한 계집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당당함의 기원을 생각해 보면 밥상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안방에 상이 두 개 들어왔는데, 네모반듯한 교자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그리고 내가 자리했고 접이식 양은 상에는 다른 식구들이 둘러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첫 손녀로 사랑을 받은 이유에서인지, 할머니 곁을 내주지 않는 나의 집요함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골집 반찬이야 거기서 거기였지만 어른들 밥상에 앉는다는 자부심이 영혼에 포만감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福(복) 자가 새겨진 밥그릇에 수북이 담긴 쌀밥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다국적의 많은 음식들이 밥을 대체하고 있지만 우리 밥상이 그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소울 푸드로 남은 어릴 적 먹던 음식이 우리를 과거로 소환하는 순간들이.
Ⅱ. 감상해 본다
마치 밥보다는 디저트의 달콤한 에너지로 사는 듯 우리 주변에는 예쁜 디저트 샵이 많습니다. 그곳에 가면 가끔 볼 수 있는 그림, 아니면 실제로 만나게 되는 진열장 속 메뉴일 수도 있는 조각 케익, 웨인 티보(Wayne Thiebaud 1920- ,미국)의 그림입니다. 백 세가 다 되어가는 그의 사진을 보면 여전히 눈동자에 귀여운 장난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애리조나 메사에서 태어난 티보는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자랐습니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을 하기도 했고, 2차 대전 당시 공군 복무 중에 연재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광고 디자이너로도 일했던 경험은 그의 작품 속에 간결한 선과 압축된 이미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림의 소재가 된 미국의 일상적인 풍물들은 단순한 형태와 가라앉은 색채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검볼 머신, 잭팟, 간이식당 음식들, 햄버거, 샌드위치, 파이, 케익, 장난감 같은 정물들이 무표정하게 묘사된 티보의 화풍은 미국적 리얼리즘으로 평가 받습니다. 1962년 패서디나미술관에서 열린 ‘일상적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회화(New Painting of Common Objects)’전을 통해 선도적인 팝 아티스트로 주목을 받았지만, 앤디 워홀과 같은 이후의 팝 아티스트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티보의 그림에서 대량 생산과 과잉 소비를 상징하는 소재들은 비판의 대상이라기보다 어린 시절의 신나는 추억이며, 그 시절 기쁨에 젖은 미국인들의 꿈과 욕망입니다. 기법 또한 찍어낸 듯한 느낌이 아니라 유화 물감의 성질을 이용한 붓 터치가 사물에 생동감을 줍니다. 1950년 다시 공부를 시작한 티보는 90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됩니다. 그는 열렬한 독서가였으며 학생들에게 시를 읽어주는 선생님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 속 사인에서 하트를 발견한다면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Ⅲ. 읽어 본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의 기억은 점점 더 단단한 결정체가 되어 몸속에 남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그 시간 속의 사물들을 하나씩 꺼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시면 좋겠습니다. 티보 그림 속의 케익 같은 것, 내 기억 속 밥 한 그릇 같은 것. 눈물짓게 하는 기억이어도 지나간 일은 다 아름답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삶을 통과해 낸 자신이 놀랍고 기특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쌀밥을 생각하며 시 한 편 골라 보았습니다.
쌀밥 먹는 시간
김은숙
경기도 여주 땅을 지나다가
쌀밥집이라는 상호를 처음 보았는데
쌀밥이라는 낯익은 어휘가
한 집의 주인으로 반듯하게 서있는 게 문득 새로워
차림표에 의젓하게 자리한 쌀밥 한 그릇 반가이 청했는데
보통의 이런저런 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의 중심에
마지막으로 올라온 쌀밥 한 그릇
한참 동안 밥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다가
입 안 가득 담아 넣는 한 숟가락의 밥
사십여 년 지탱해온 내 몸의 모든 것이
때마다 떠 넣은 밥숟가락에 힘입은 것이어서
내 디뎌온 발자국 하나하나가
이 쌀 한 톨 한 톨의 힘이 아닌 것이 없어서
앞에 놓인 쌀밥 한 그릇 한 숟가락의 밥이
새삼 가슴 뜨겁게 뭉클해지는데
뿌리 끝 흔들리는 절망에 닿아서도 서로를 부축하여
굳건히 어깨를 결어온 벼들이 들판 가득 일렁이고
불어오는 바람도 넉넉히 품는 서늘한 깊이가
고단한 일상의 허기를 채우는 이 땅의 가을
입 안 가득 쌀밥을 꼭꼭 씹어 삼키며
한 톨 한 톨의 쌀알들이 뜨겁게 몸을 데우는 시간
영혼의 허기도 비로소 삭아들며 푸근해지고
한 그릇의 밥 앞에서 숙연해지는 가을 한나절
생활에 지치고 발걸음 무거운 이들에게 나도
더운 김 솔솔 나는 뜨거운 밥 한 그릇 지어내고 싶다
정호경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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