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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일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8-01-29 (월) 10:39 조회 : 220
빵-집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 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 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봤지만, 삐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아이를 떠올리며

- <빵집> 이면우


아내가 ‘빵집’을 합니다. 아내는 ‘제과점’이나 ‘빵가게’라고 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가 ‘빵집’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들을 때마다 정겹습니다. ‘격’은 있어 보이나 ‘정’은 좀 모자라 보이는 ‘제과점’이라든가,그저 돈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 ‘가게’라는 말보다 한결 따뜻하게 들립니다. 거기에 ‘빵’만 있는 게 아니라 ‘집’도 있기 때문일까요. ‘빵’이라는 수단과 ‘집’이라는 목적/의미가 함께 든 이름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수단과 목적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사는 게 흔해 빠진 일상이고, 그 일상에 지쳐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집 빵 사가세요” 빵을 파는 사람들의 소원이 저 한 마디에 다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소원이루겠다고, “우리집 빵” 좀 더 팔아보겠다고, 이벤트도 하고 행사도 하고 그러는 거겠지요.

그런데, 이 집 사장님들은 그런 주변도 없었다던가요. “초록 크레파스로” “삐뚤빼뚤” 몇 글자 적어 놓은 “두 뼘 도화지”가 그 집 ‘행사’의 전부였던 모양입니다. 누가 시켜 한 짓은 아닐 듯하여, 기특하고 재미도 있어 저렇게 버젓이 유리창 한 쪽을 차지하게 두었을 겁니다. 빵 하나 더 팔자고 아이까지 팔 부모는 아닐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하는 “집 걱정”이 문제입니다. 부모야 아이까지 팔아서 먹고 살 마음 없다지만, 아이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이 ‘집’에 든 ‘빵’ 몇 개라도 더 팔아야 엄마 아빠 얼굴이 환해지더라는 걸 오랜 동안 보아왔기 때문일까요. “삐뚤빼뚤” 글씨조차 가지런히 적어 놓지 못할, 아직도 “크레파스”가 손에 익숙한 어린 아이의 그 마음이 어쩐지 아이의 글씨보다 더 헝클어져 있어 보여 안타깝습니다. 아무래도 그 집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보다 “집 걱정 하는 아이”의 거친 마음이 먼저 눈에 든 까닭일 겁니다.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그걸 읽습니다. 그럴 겁니다. 뻥 뚫린 초록 신호등 길 위에선 그게 보일 리 없지요. 어느 스님 말마따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입니다. 멈춰선 길 위에서그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요. 그걸 보고 멈칫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아,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만 파는 ‘빵가게’가 아니구나, 여느 집못지 않을 “걱정”을 “아이”에게까지 들켜버려야 하는 ‘집’이 저기에 있구나, 저기 “빵집”이 있구나를 알게 됩니다. 널브러진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아야했던 이유입니다.

본디 예수님 태어나신 마을 ‘베들레헴’이 ‘빵집/떡집’이었다지요. ‘생명의 떡’(요한복음 6장 48절)이신 그분이 ‘떡집-베들레헴’으로 찾아오신 것은 마땅해 보입니다. 그 ‘마땅함’이란 비단 베들레헴에만 어울리는 수식이 아닐 겁니다. 그 ‘떡’ 찾아든 모든 인생의 자리가 곧 ‘떡집’이요 ‘빵집’일 테니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저마다의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만 있는 건 아니겠습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주님께서는 지금 저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으시며 ‘당신’과 ‘나’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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