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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일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7-12-04 (월) 16:02 조회 : 314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난생 처음 큰일을 보게 되었다
배변 습관이 고약한 탓에 집 떠나면 식탐부터 줄이는데 배탈 앞에서는 도리가 없다
건물의 특성상 천장이 뚫려 있어 민망한 소리와 역한 냄새를 옆 칸과 공유해야 하는 일이 영 마뜩찮지만 하는 수 없이 용무를 마치고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서둘러 물을 내린다
밥 잘 먹고 똥 잘 싸는 일이 인간사 기본이거늘 왜 그 일이 불편하고 유쾌하지 못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아가리 벌려 똥 받아 삼켜 주고도 오물 취급받는 공중화장실 기분은 어떨까 싶어졌다
조물주가 공들여 만든 덕에 구린내가 진동하지 않다뿐 실상 내 안에도 구불텅구불텅 장 속에 내려가지 못하고 눌러 붙은 똥덩이가 어디 한두 근이겠는가 제 몸이 곧 똥통인 줄도 모르고 똥의 전생이 바로 밥이었음도 모르는 주제에 시를 쓰며 살아온 나를 물찌똥은 또 얼마나 비웃었을까
- 손세실리아 <똥詩>

‘부산앞바다’의 반대말이 뭔지 아시나요? ‘부산엄마다’랍니다. ‘부산아빠다(앞바다)’의 반대말이니까요. 실없는 ‘아재 개그’라서 어디 가 함부로 입 밖에 내면 욕먹습니다. 그렇듯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낱말 중 하나가 ‘똥’이라 하겠습니다. ‘분뇨’니 ‘배설물’이니 하는 순화된 말로 바꾸어 부르는 것도 저 된소리 한 자 낱말 발음이 천해 보인 까닭이겠지요. 엄마들은 아이들 입에 ‘똥’이라는 낱말 오르내리는 게 마뜩찮아 ‘응가(아)’라는 특별한 이름을 만들어 붙여 주기도 한다지요. 이름이 바뀐다고 내용까지 바뀌는 건 아니겠는데, 그렇더라도 어쩐지 ‘똥’과 ‘응가(아)’는 받아들임의 정서를 사뭇 다르게 합니다.

‘부산’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여 보지요. 부산, 기장군 기장읍에 특별한 이름을 가진 항구가 있답니다. 그 이름이 ‘대변항’이라지요. 해양수산부가 지정한 ‘가장 아름다운 어촌 100곳’에 오를 만큼 미항이라 하니 한 번 걸음해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말썽이었던가 봅니다. 그러게요 ‘대변항’이라니요. 그 항구에서 회 한 접시 받아들고 그 이름을 떠올리면 무언가 연상되는 그림이 있어 회 맛이 영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여행객의 회 맛이야 뭐 그리 대수로울까요. 하지만 그 이름을 짊어지고 한 평생 살아가는 그 마을 주민들의 고충은 뭐라 한 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겠습니다.

그 마을 초등학교 이름이 ‘대변초등학교’랍니다. 오래 전 경주 불국사에를 가보니, 그 옆에 있는 초등학교 이름이 ‘불국사초등학교’더군요. 처음에는 사찰에서 부설로 운영하는 학교인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습니다. 공립학교였고, 그 지역 이름을 따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그런 거지요. 불국사 옆에 있어서 ‘불국사초등학교’가 되었고, ‘대변항’ 마을에 있어 ‘대변초등학교’가 된 겁니다. 그뿐입니다. 그런데, 그 학교를 다니는 초등학생들에게 그 이름은 ‘그뿐’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너희는 ‘똥학교’에 다니니?” 놀림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요. 아이들이 듣고 넘기기에 결코 가벼운 놀림이 아니었을 겁니다.

급기야 아이들이 들고 일어선 모양입니다. 이 학교 ‘부회장’으로 나선 아이가 공약으로 ‘교명 변경’을 내걸었다지요. 초등학생 부회장의 터무니없는 공약이려니 했겠는데, 학부모를 설득하고 동문들과 지역주민들을 설득해서 4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답니다. 곧 학교 이름을 바꾸는 행정절차만 남았다고 하네요. ‘대변’을 대신할 새로운 이름은 ‘해파랑’ ‘차성’ ‘도담’에서 하나를 고른답니다. 각각의 뜻을 다 알 수 없지만, 예쁜 뜻을 담았겠지요. 바뀌는 이름에 깃든 예쁜 뜻이야 더할 나위 없는 것이겠습니다만, 굳이 그 뜻을 다 새겨 담고 살지 못해도 옛 이름 벗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이게 다 ‘똥’ 때문에 생겨난 일이겠는데, 그런데 ‘똥’을 이렇게 대해도 괜찮은 걸까요. “밥 잘 먹고 똥 잘 싸는 일이 인간사 기본이거늘” 글쎄요, “왜 그 일이 불편하고 유쾌하지 못”한 걸까요. 정말 “조물주가 공들여 만든 덕에” 자기에게서는 “구린내가 진동하지 않다” 여기는 까닭일까요. “내 안에… 눌러 붙은 똥덩이”의 근수를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장 속까지 파 들어가 그 냄새 맡아보지 않더라도, 이미 ‘구린내 진동하는’게 사람 사는 모습 아니던가요. 그게 어디 샴푸로 머리감고 향수로 몸을 가린다고 다 벗어질 냄새이던가요. 그러고 보면, ‘똥’이 더러운 만큼 ‘나’도 더러운 건 아닐까요.

성경에도 ‘똥’과 관련된 본문들이 더러 나오는데, 대개 ‘발을 가리다’라는 완곡한 표현을 씁니다. ‘용변을 본다’는 뜻이지요(사무엘상 24장 3절, 사사기 3장 24절). ‘똥’과 관련하여 아주 익숙한 본문은 빌립보서 3장일 겁니다. 사도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배설물로 여긴다” 말합니다(빌립보서 3장 7-8절). 전에 그것으로 내가 ‘유익’했노라고 했던 것들이 이제는 ‘무익’할 뿐 아니라 ‘똥’과 같은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돌아보니 그동안 ‘똥칠하고 살았다’는 말이기도 하겠습니다. 그것도 모르고-“제 몸이 곧 똥통인 줄도 모르고.” ‘똥’만 더럽다 하며 살았으니, 그간 눈똥이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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