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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가 있는 곳
길은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 ‘나’와 ‘너’를 이어줍니다. 인간은 그렇게 길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곳과 이곳을 만납니다. 길은 단순히 공간 이동을 위한 통로만이 아닙니다. 길은 ‘나’와 ‘너’의 나눔과 문화를 공유하게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랬듯이 이 땅의 길을 걸으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동행할 수 있다면 삶의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산티아고가 아니어도 존재의 의미를 더할 수 있다면 그 길을 함께 걸어보면 어떨까요?
오래된 것은 낙후한 것, 쓸모없는 것, 가치 없는 것, 그래서 버려야 하거나 개량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도시화를 거듭하면서 그것을 개발이고 성장이라고 여깁니다. 언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옛 건물을 헐고 아파트를 짓는 것이 개발과 성장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래된 것은 골칫거리고,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파트가 마천루를 이루는 도시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토지와 건물의 이용이 전적으로 수익과 직결되면서 돈이 덜 되는 것은 빠른 속도로 다른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하거나 적어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건물,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임대료를 받을 수 있다면 문화재라고 할지라도 어떻게든 그렇게 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카페지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자주 이용하는 고서점 주인이었습니다. 금년 말로 서점을 닫을 예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대를 이어서 고서점을 운영해왔고,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서 서지(書旨)를 공부했고, 나름 의식있는 젊은이였는데 너무나 아쉬워하는 내 말을 한참이나 말없이 듣고 있더니, “선생님! 폐업을 선택하는 것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건물 임대료조차 감당할 수 없고, 생계가 불가능한 상황이 몇 년 동안 계속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그의 말은 “선생님! 지금이라도 이사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만 확보할 수 있다면 굶더라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고서점은 책을 갖고 이사를 다닐 수 없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도, 어느 구석에 있을지라도 옮기지만 않고 계속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서점을 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아팠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절규는 단지 그의 생계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더 아팠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의 아픔을 나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내가 학창시절 청계천은 전체가 고서점 거리였습니다. 대학생이라면 고서점 거리에서 자신이 필요한 책을 찾아 한나절씩 쾌쾌한 냄새와 책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멋으로 알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대학생이었고, 적어도 최고학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거의 매일 찾는 서점에는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서점마다 취급하는 책의 종류가 다른 것까지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을 만큼 자주 찾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청계천 고서점은 하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카페들이 대신 차지하면서 카페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커피 한 잔 값이 만만치 않습니다. 커피 한 잔을 통해서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한 잔 값이면 중고 책 한 권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커피에 밀린 책은 쓰레기나 폐지가 되어 사라져갔습니다. 구사일생 살아 남은 책은 마지막 남은 어떤 서점이나 다행히 그 책을 찾던 사람을 만나서 그의 서가에 꽂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서와 고서점은 그 나라의 문화와 의식, 학문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한데 우리는 모두 버렸습니다. 이제는 전국적으로 남아있는 고서점이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이든 주인장은 서지에 대한 자긍심은 고사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서점을 평생 일군 것이기에 버릴 수 없어 붙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러한 고서점과 고서가 폐지가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그것을 이용한 현대인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그곳엔 고서점이 있습니다. 단순한 고서점이 아니라 고서를 정리해 놓은 서가가 눈요깃거리로 충분한 분위기 있는 서점입니다. 서지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공부하는 공간책을 주제로 나눌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널찍한 공간에 놓여있는 나무의자는 서점을 돌아보다가 앉아 각각 나이가 다른 책들의 냄새에 취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요즘 커피가 대세니 서점 1층에는 카페도 갖춰 쉼과 함께 고서점이 주는 멋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카페와 서점이 사실상 한 공간인데 대형통유리로 칸막이를 만들어놓아 커피를 마시며 서점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곳엔 고서점만이 아니라 주변에는 출판문화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고서적 박물관을 비롯한 출판기기들을 전시한 공간도 있습니다. 책을 주제로 한 종합문화공간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붉은 벽돌로 지은 대형 창고 7개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공간들입니다. 그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에 있는 삼례 책마을입니다. 완주군에서 의욕적으로 농협이 창고로 사용하던 건물을 이용해서 만든 문화공간입니다. 기차를 타고, 아니면 버스로 책마을이 있는 삼례를 찾아 그곳에서 미래를 만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책마을 대표 박대현 이사장은 오래된 미래를 지키려 그곳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몇 안 되는 서지학자입니다.
이종전 교수 (개혁파신학연구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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