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액션
1992년 11월 28일 저녁 9시 극장 씨네하우스에서 관람했던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라스트 모히칸>은 제게 잊을 수 없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미국 인기 드라마 <마이애미 바이스>의 제작자로 활동했던 마이클 만 감독은 선 굵은 범죄 누와르 영화를 연출하며 사회 체제와 인간의 갈등을 통해 특유
의 영화적 정체성과 톤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당시 제가 영화를 볼 때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알았더라면 더 재미있게 영화를 볼 수 있었겠지만 중학교 1학년 학생에게는 너무 전문적인 지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 <라스트 모히칸>은 저에게 큰 영화적 임팩트를 남겼습니다. 일단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영화의 장면들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물론이고 영화의 숏들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얼마 후 저는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났습니다. 첫해는 부모님과 함께 시카고에서 살았지만 부모님은 곧 귀국했고 형과 저는 미국에 남았습니다. 미리 계획된 이별이었다고 해도 부모님과의 생이별은 어린 우리 형제에게 너무도 큰 아픔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무한 사랑으로부터 잘려나간 듯한 느낌은 제 마음속에 큰 공허함을 만들었고 그 공간을 무엇으로든지 채우고 싶었습니다. 비록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온통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한국에서 즐거웠던 어제의 모습을 그리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생활과 언어에 적응하도록 도운 친구는 바로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통해 내가 변할 수 있는 내일의 모습을 상상하며 희망에 부풀곤 했습니다. 영화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마음껏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때는 1997년 어느 여름 밤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대학생이었던 형과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 시간을 보니 새벽 2시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대학교를 가면 신문방송학과를 갈 것인지 아니면 영화학과를 갈 것인지 고민하던 때였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영화를 봤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 자막이 올라가는데 다시 한번 그 자리를 뜰 수 없는 경험을 했습니다. 영화가 남긴 잔상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제 마음 속을 크게 울리는 질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바로 ‘기독교 영화’에 관한 것입니다.
미국은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아했던 것은 음악에서 CCM(뮤직)은 존재하는데 영화로서 CCM(무비)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영화라는 매체는 매년 발전해가는 데 기독교 영화는 언급도 되지 않을뿐더러 그게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기독교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영화 예수”, “벤허”, “십계” 등 성서에 나온 인물들이 직접 등장하거나 성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기독교 영화라고 생각하기 일쑤였고, 성서에 소개된 이야기를 토대로 했지만 조금이라도 내용에 비틀기가 있거나 새로운 상상력이 가미된다면 성서를 모독했다고 비판하기 바빴습니다. 기독교 영화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좁은 영역의 정의를 내려놓고 그 밖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을 기독교와 선을 그으면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영화에 대해 논의해 온 것입니다.
저는 그날 밤 영화를 보고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안에 남은 감정과 이야기는 세상을 뛰어넘는 사랑, 모두가 꿈꾸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꿈 그리고 새로운 상상력 등에 관한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통해 소개된 내용들은 분명 제가 성서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들과 결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등장 인물이나 내용에 있어서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영화를 기독교 영화라고 부르지 않았고 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교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기독교 교육을 할 수 없다고 상정하는 것과 유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미 우리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가치를 전달하는 책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그날 새벽 기독교 영화의 정의에 대해 씨름하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기독교 영화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여전히 한국 땅에서 기독교 영화에 대한 현주소는 97년 당시 생각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 작품의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속설이 기정사실화 된 듯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 영화란 무엇일까요? 이 고민은 진지한 질문에서 시작돼야 합니다.
그냥 기독교라는 종교적 외피만 두르고 있는 영화의 시대는 저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전혀 소통하지 못하고 그저 정답만을 외치는 기독교 교리 같은 영화는 ‘영화다움’을 전혀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기독교적 신념들을 강화시키는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이 세상안에서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대화하는 영화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제대로 된 기독교 영화를 향한 첫 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 혹은 기독교 인물들이 소재가 돼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상상력을 통해 기독교 영화에 대한 고민들이 깊어지길 소망해 봅니다.
강도영 기획자 (빅퍼즐 문화연구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