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칼럼

길 따라 사람 따라

길은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 ‘나’와 ‘너’를 이어줍니다. 인간은 그렇게 길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곳과 이곳을 만납니다. 길은 단순히 공간 이동을 위한 통로만이 아닙니다. 길은 ‘나’와 ‘너’의 나눔과 문화를 공유하게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랬듯이 이 땅의 길을 걸으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동행할 수 있다면 삶의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산티아고가 아니어도 존재의 의미를 더할 수 있다면 그 길을 함께 걸어보면 어떨까요?

자유로를 타고 일산 신도시를 지나 파주로 가다보면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이 있습니다. 헤이리라고 알려진 곳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문화적인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경제성장과 함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문화적 누림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마 헤이리가 그곳에 자리하게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헤이리가 알려지자 주말이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더불어 맛집들도 들어서고, 잠깐 시외로 나가 쉼과 먹는 기쁨까지, 그리고 관심이 있다면 이런저런 볼거리와 체험할 것들을 만날 수 있으니 모여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리 멀지 않고 찾기 쉽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찾는 곳이지만 근교에서 해질녘의 풍경이 이만큼 아름다운 곳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20년도 더 지났네요. 헤이리가 형성되지 않았던 그때 그곳은 아직 휴전선에 가까운 전방의 느낌이 더 많았던 곳이지요. 당시만 하더라도 이곳저곳이 접근이 금지된 곳이 있었습니다.

석양이 아름다운 언덕에 자리한 레스토랑에 앉아 한강하구로 이어지는 넓은 들녘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서 일부러 찾곤 했던 기억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카페는 없었습니다. 겨우 레스토랑에서 김빠진 커피를 얻어 마실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던 시대였지요. 계절과 관계없이 그곳은 저녁의 풍경이 특별하다는 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겨울에는 설경이, 가을이면 따뜻한 남쪽을 찾아오는 철새들의 군무가 석양의 노을과 함께 아름답습니다. 봄이면 대지가 연출하는 생명력을 느끼게 하고, 여름이면 검푸른 들녘이 바람과 함께 경이로운 정경을 만들어줍니다.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경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지요.

오늘 찾아가는 곳도 석양이 아름다운 길 위에 있습니다. 헤이리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프로방스라는 레스토랑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등성이로 열려있는 길을 따라 금산리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이내 한적한 시골길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그곳에 길이 있었고, 그 길은 누군가의 발걸음과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소개를 받고 처음 찾아가던 날이 생각납니다. 늦은 시간에 낯선 곳을 찾아가는 길인데 음악회를 할 만한 공간이라고 생각되는 건물이 보이지 않아서 적지 않게 당황을 했던 기억입니다. 음악회 시간은 거의 다 됐고, 해는 이미 져서 어둠이 짙어지는데 음악회를 하는 장소는 아직 찾지 못한 채 외진 길에서 지도를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순간에 전방에 불빛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창고였습니다. 지도상으로는 그곳이 맞는 것 같아서 길가에 차를 대고 찾아들었습니다. 고갯길에 잇대어 있던 밭에 지어진 창고였습니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의심했던 눈을 다시 의심해야 했습니다. 창고로 지어진 건물을 이용해서 입구에는 카페로 꾸몄고, 카페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그 공간을 공연장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공연시간에 촉박하게 도착했기에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도 없이 바로 공연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공연장이라야 나무로 단상을 만들어서 무대를 설치했고, 청중들을 위한 시설이라곤 간이 의자가 전부였습니다. 내가 들어섰을 때는 30여 명의 팬들이 웅성대면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무대에 등장한 성악가들의 소리는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을 찾아들면서 느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어떻게 이런 곳에서 최고의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의아했습니다. 성악가들의 호흡소리, 표정연기와 함께 들려지는 소리는 이내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습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소위 명문 음대 출신들이고, 성악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다녀온 젊은 가수들이 노래가 좋아서, 자신들의 끼를 발산하고 싶어서 모여들어 공연하는 곳입니다.

<아리스타>라고 하는 카페와 공연장이 같이 있는 공간입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커피와 음악이 있습니다. 지나는 길에 잠시 들러 커피와 함께 쉴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천 성악가들이 모여서 음악을 좋아하고, 그것을 나누는 기쁨으로 함께하는 곳입니다. 시간을 내고, 값 비싼 표를 사서 정장을 차려입어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가며오며 들러서 잠시 쉴 수 있는 곳이고, 공연이 있는 날에는 편안하게 찾아가 커피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정통 클래식 성악을 전공한 젊은 성악가들의 열정과 음악에 대한 뜨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아리스타>, 그곳은 길에서 만난 행복 창고입니다.

크리스천들이 뜻을 같이해서 만들어가는 무대는 오페라의 아리아를 중심으로 감명 깊은 선율들이 작은 공간의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대표로서 <아리스타>를 이끌고 있는 테너 유상현은 교회의 찬양대를 지휘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선물하고 있는 멋진 사람입니다. 나는 오늘도 그를 만나러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곳이기에 찾아가는 길도 행복합니다.


이종전 교수(개혁파신학연구소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