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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8희(喜)
조선의 긴 역사 속에서 반짝이는 두 지성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흔히 퇴계와 다산의 이름을 올립니다. 겸손한 듯 단단하고, 유려한 듯 깊이를 잃지 않는 그들의 학문은 한 나라의 기둥이자 동아시아 정신사의 숨결이 되었습니다. 다산의 삶에는 운명처럼 찾아온 네 번의 만남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만남은 개혁 군주 정조였습니다. 정조는 다산의 총명함을 알아본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대는 내가 아끼는 학자다.” 두 사람은 실학이라는 현실의 사상으로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습니다. 정조가 있었기에 다산은 학문의 날개를 달았습니다.
두 번째 만남은 형 정약전이었습니다. 유배지에서도 책을 쓰면 가장 먼저 형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의 학문은 편지가 되고, 기다림이 되고, 메마른 유배지의 바람을 견디게 하는 서로의 숨이었습니다.
세 번째 만남은 혜정 스님이었습니다. 유배지의 적막 속에서 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던 친구. 하지만 아름답게 피어났던 만남은 짧았습니다. 젊은 스님의 요절은 다산의 가슴에 또 하나의 빈자리를 남겼습니다.
네 번째 만남은 ‘초의선사’였습니다. 아들 같고 제자 같고 친구 같은 존재. 초의가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은 싸늘한 유배의 밤을 밝혀주는 작은 등불이었습니다.
그렇게 18년. 시간은 다산을 버리지 않았고 다산도 시간을 배반하지 않았다. 유배지에서의 외로움을 학문 연구로 이겨냈습니다. 유배지에서 읽었던 5,000권의 책, 그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며 써 내려간 정치·문학·역사·지리·천문·의학·음악의 책 500권. 해배되던 날 다산은 그 모든 것을 마차에 싣고 고향 남양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경세유표』로 나라의 기준을 세우고, 『흠흠신서』로 법의 기준을 세우고, 『목민심서』로 백성을 돌보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유배는 다산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으나 온 백성에게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사어안락 생어우환(死於安樂 生於憂患)’, 궁중의 안락은 나를 잃게 했고, 유배의 고통은 나를 살게 했다.”
다산이 <인생 8미(味)>라 하여 삶의 8가지 맛을 나누었다면 나는 오늘 내 삶의 8가지 기쁨을 헤아려봅니다.
1. 신앙지희(之喜), 빛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파스칼은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만 채울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삶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듯할 때 나를 붙드는 한 줄기 빛이 신앙이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주신 기쁨은 곡식과 포도주가 차오르는 날의 환희보다 더 충만합니다.
2. 학습지희(之喜), 배우는 자의 자유입니다. 배우는 일은 내게 기쁨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평생 배울 수 있다는 것, 삶이 직접 건네는 은총이고 보석이고 큰 선물입니다.
3. 비전지희(之喜), 가슴이 뛰는 방향입니다. 사람은 꿈을 품을 때 비로소 살아집니다. 비전은 공기와 같습니다. 바다를 보며 배를 만들 꿈을 꿉니다. 이룰 수 있든 없든 상관없습니다. 꿈이 있는 가슴은 늘 푸르고 넓습니다. 하늘을 걷는듯, 바다를 건너는 듯 살아갑니다. 비전지희 비전은 가슴을 뛰게 합니다.
4. 일터지희(之喜), 일은 나를 빛나게 합니다. 교수로 살고, 가족상담소를 이끌고 살며,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유튜브 채널을 통하여 대중과 소통합니다. 독서 모임의 북마스터로, 칼럼을 통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일은 내 삶의 기쁨이자 에너지입니다. 일은 나를 지치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나를 살아 있게 합니다.
5. 가족지희(之喜), 지붕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은 짐이 아니라 날개입니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지붕이고 세상의 추위를 덜어주는 난로입니다. 가족은 어두운 세상을 밝혀줍니다. 가족이 있기에 나는 다시 걸어갈 수 있습니다.
6. 친구지희(之喜), 인생이라는 긴 강을 건너는 동행입니다. 중학교 2학년 짝으로 만나 60년 지기 절친이 된 친구, 매달 초하루마다 문안 편지를 보내주는 친구, 초등학교, 중학교, 교회와 목장의 친구들까지. 그들은 내 인생의 여러 강을 함께 건너 준 사람들입니다. 우정은 조용하지만 언제나 빛납니다.
7. 멘티지희(之喜), 누군가의 성장을 바라보는 기쁨입니다. 한국장학재단 멘토링을 인연으로 십여 년간 함께 지내 온 30여 명의 멘티들. 스무살의 앳된 얼굴들이 이제는 직장인이 되고, 결혼하여 부모가 되고, 사회 곳곳에서 당당하게 일하는 것을 볼 때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듯한 기쁨이 찾아옵니다.
8. 봉사지희(之喜), 남겨지는 흔적이다. 돈을 가장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은 어려운 이웃에게 쓰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인생은 소풍처럼 짧은데 내가 떠난 뒤에도 남는 건 내가 베푼 사랑의 흔적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이렇게 인생 8희(喜)를 써 내려가며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다산이 어둠 속에서 별을 길어 올렸듯 내 인생에도 여덟 개의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별들을 따라 걸어온 길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여정도 이 별들이 이끌어 줄 것입니다.
엄정희 교수 ( 서울사이버대학교 교수, 북쌔즈 가족상담소 소장, 유튜브방송,<Dr.Duck 결혼에비학교> 진행, 도서출판 북쌔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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