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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觀光), 왕의 얼굴을 보다 Ⅰ. 생각해 본다. 평상시에는 내가 어느 땅 위에 있는지 생각 없이 살다가 가끔 지도를 볼 일 이 생기면 우리나라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흘러내린 물방울처럼 매달려 언제든 단번에 끌어당겨 버릴 것만 같은 대륙의 힘을 버텨내야 했고 주도면밀한 바다 건너 야심을 견제해야 했던 과거, 어쩌면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연을 가진 나라가 나의 나라구나 생각하며 손가락으로도 가려지는 영토를 쓰다듬어 봅니다. 아쉬운 부분이 참으로 많기는 하나 그래도 지금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그 오랜 시간의 굽이굽이마다 맺혀 있는 사연들은 참으로 값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고는 즐겁습니다. 일제 36년 식민사관의 눈가리개를 벗고, 옛 부터 지금까지 우리 본 모습을 자랑할 수 없게 하는 사대주의적인 생각들에 찬물을 끼얹고, 우리의 소중한 기록들을 해독할 수 없는 한자에 대한 무지함을 겸손히 인정하며 역사 인식을 향해 한걸음씩 발을 옮깁니다. 먼저 가슴 아픈 현대사를 낳을지 모르는 채 오백년을 이어 온 조선의 깊고 넓은 품이 기다립니다. 조선왕조실록 한권 서가에 꽂아두고 왕들의 행적을 읽다보면 당대 백성들의 삶이 보입니다. 위대한 왕들이 여럿 있지만 마음은 이미 정조 대왕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Ⅱ. 감상해 본다. 조선 22대왕 정조는 사극과 영화로 이시대의 대중적인 인기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그의 삶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듯 실로 애잔하고 극적입니다. 수많은 살해의 위협 가운데 왕위에 오른 그는 규장각과 당대의 실학자들을 힘입어 문화정치를 실현합니다. 정조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당대의 행사가 있습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연회 장소인 화성(지금의 수원성곽)으로 길을 떠납니다. 그 100리길은 화성 현륭원에 모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동갑내기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 대한 아들 정조의 지극한 효성은 이 행사 안에서, 화성을 건축한 명분 뿐 아니라 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정조의 왕권을 확고히 하는 일과 하나가 됩니다. 연회를 위한 행차는 1795년(정조 19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계속되는데 이는 사도세자가 숨지기까지 뒤주 속에 갇혀 있던 팔일이라는 기간과 일치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8권의 책으로 완벽하게 기록됩니다. 주요 장면들은 ‘화성행행도팔첩병(화성으로 가는 왕의 행차를 그린 여덟 폭의 병풍)’으로 남아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그림인 ‘노량주교도섭도’를 감상해 봅니다. 왕과 왕대비를 모신 1,700여명의 대규모 일행이 서울 남쪽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는 모습이 화폭에 담겨 있습니다. 강폭이 600백 미터나 되는 까닭에 다리를 놓을 수 없어 배 48척을 모아서 그 위에 판자를 놓아 임시 배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배다리를 건너는 장관을 그림 속 백성들은 마음껏 구경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행차 내내 왕의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왕의 얼굴, 즉 빛을 본다’는 의미로 ‘관광(觀光)’이라 했습니다. 그 먼 길은 왕에게도 백성들에게도 행복한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Ⅲ. 읽어 본다. 49세. 정조의 때 이른 죽음은 참으로 슬프고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백성들에게 자발적으로 얼굴을 보인 왕, 길 위에서 그들의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왕. 다정하고 친밀한 그 성품이 참 그립습니다. 가슴 아픈 유년 시절을 보냈을 정조 대왕이기에 백성들을 향한 그 얼굴빛은 진심어린 것이었으리라 믿습니다. 끝으로 조선의 성군께 누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글과 그림에 뛰어났던 정조가 5세 무렵 숙모에게 한글로 쓴 편지를 읽어보려 합니다. 가을바람이 불어 올 시기에 어울리는 글입니다. 열왕기를 묵상하면서 우리 역사 속의 좋은 왕들을 추억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 바라오며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할아버지께서도 평안하시다 하시오니 기쁘옵나이다. 원손 정호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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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주교_도섭도.bm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