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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끝에선 한 남자
모든 기억은 소멸합니다. 그나마 ‘기억’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만이 끝까지 남아있을 뿐 과거에 있었던 대다수의 일들은 어느새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고 결국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문득 낡은 앨범을 보았을 때, 손때 묻은 장난감이나 옛 물건들을 발견했을 때, 예전에는 아주 중요하고 크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어느새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하나의 점으로 변했을 때. 우리는 세월이 가지는 힘과 그 속도에 대해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여기,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라 불리우며, 완고하고 무뚝뚝하며 고집불통에 함께 있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는 다양한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어렸을 때는 ‘슈퍼맨’이라고 부르며 따랐지만 이제 그를 ‘웬수’라 부릅니다. 한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 것이라 여겼던 스위트 홈은 이제 각자가 지은 또 다른 집이 꽉꽉 들어차게 되어, ‘집속의 집’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뮤지컬 <아버지>는 한 가족에게 불어 닥친 불행이 어떤 상처가 되고, 그 상처는 다시 어떤 흔적을 남기면서 꽃피우는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버지 이도형과 어머니 한다희의 스물 다섯 번 째 결혼 기념일. 가족들은 단란하게 가족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교통사고가 나게 되고, 가족은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감당하게 됩니다. 자식들은 점점 자신의 집속에 틀어박히게 되었고 아버지는 희미해져가는 과거의 기억들을 붙들기 위해 아등바등합니다.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어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는 이도형과 그를 답답해하는 아들 윤수, 아버지를 간병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딸 윤희, 그 사이에서 힘겨워하는 어머니 한다희는 아주 오랜만에 다시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과연 그들은 각자의 집 에서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을까요?
‘알츠하이머’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긴 하지만, 이들 가족은 오늘날의 무수한 가족들의 표상인지도 모릅니다. 한 가족 사이에서도 서로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은 ‘모든 가족은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을 전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아픔을 주었다고 해서 끊어낼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는 그 관계는 어쩌면 촘촘한 기억의 씨줄과 날줄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세상 어떤 기억보다 단단한지도 모릅니다. 한 남자와 여자의 운명적 만남, 새로운 생명의 탄생,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별과 소멸의 단계까지... 가족 구성원의 모든 기억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느꼈던 기쁨과 슬픔을 서로 공유하며 다같이 성장하게 됩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관료지원사업 선정작인 뮤지컬 <아버지>는 지난 9월 중순, 국립극장 별오름 극장에서 리딩 공연을 거치며 초연을 준비해 왔습니다. 무대화 작업 이전에 최소화된 독회 공연으로 관객들의 사전 평가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가벼운 상업 공연들이 한 달에도 몇 십 편씩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사라지는 환경 속에서 이 작품은 관계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차근차근 개발과정을 밟아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끝자락에 외롭게 서있는 ‘아버지’와 희생적인 ‘어머니’의 아련한 황금빛 사랑을 담아 최근 다른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뮤지컬 <아버지>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과 손을 잡고 보게 된다면 스산한 가을 저녁, 어쩌면 겨울의 초입에서 마음이 꽁꽁 얼어붙을 때, 그래서 기억마저 단단한 방안으로 들어가 버릴 때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작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INFO
일시 : 2014년 11월 1일(토) - 11월 7일(금)
화-금 8시 / 토 3시, 7시 / 주일 3시
장소 : 국립극장 별오름
티켓 : 전석 25,000원
작 : 김성배
작곡 : 이율구
연출 : 이강선, 이정섭
음악감독 : 성경
출연 : 전흥선, 지우림, 조동현, 김민지, 박은영, 이상은
제작 : 스튜디오 반
문의 : 02-352-0766
한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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