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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꽃’의 아름다움
그는 태생상 하나의 성소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누군가가 죽음과 태양을 바로 쳐다보고 존재의 얇은 빙판을 밟게 되는, 위대한 장소는 될 수 없다는 깨달음. 그는 심하게 먼지 나고 들어가기에 너무 비좁은, 몹시 높고 붉은 쪽문을 가진 다락방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도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곳이 부서진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곳이었으면. 낡고 쓰다버린 것이지만 먼 나라의 것이라 낯선 폐품 더미 속에서 잠시 혼이 나간 아이처럼, 도무지 쓰임을 알 수 없는 이상하고 망가진 물건들 사이에서, 또한 모든 이가 어느 다락방에 쌓인 낡은 몰락의 일종이었음이 문득 자연스러 워지는 오후 한 때 - 진은영 <일대기>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그런 바람하나 쯤 가져 본 적 있을 겁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하지만 꼭 못난 사람이 아니어도 그런 절망 앞에 서 보았을 거예요. ‘내가’ ‘좋은 사람’이아니더라는. 모름지기 더 못난 사람일수록 전자의 바람에, 더 나은 사람일수록 후자의 절망에 가깝겠지요. 어쩌면 살면 살수록 후자에 더 가까워지는 게 일반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 좋은 남편이고 싶고 더 나은 아빠이고 싶으나, 결국 그렇지 않은-그럴 수 없는 내 모습을 확인했을 때의 난처함. 그걸 반복하며 지내다 종점에 다다르는 것 아닐까요. ‘나는 내가 이럴 줄 몰랐다’면서 말입니다.
난처함의 반복. 그건 유쾌한 일이 못 됩니다. 그럴 때마다 든 자괴감을 몰래 삼키려다 목에 걸린적이 한두 번 아닙니다. 저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켁켁 뱉어내려 애써보지만, 그 후회의 헛 구토에 속 시원해 진 적 없습니다. 그래서 못난 사람이 자기의 못남을 확인하게 되는 모든 자리는 쥐구멍 찾지 못한 안절부절이 돼요. 더러 자기 못남을 끌어안지 못하고 엇나간 이들의 성난 폭력을 볼 때가 있지만, 알고 보면 그것도 그들의 안절부절일 겁니다. 정직하게 자기를 들여다본다는 건 두려운 일. 그러니 ‘나’를 ‘나’로 알아가는 여행 가방에는 용기도 같이 담아야 합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게 무슨 수학공식 같은 건 아닐 겁니다. 해제의 미로를 따라가다 보니 필연 정답을 찾았노라, 그런 인생이 어디 있을까요. 소크라테스 혹은 예수님에게서나 그런 인생을 볼 수 있으려나요. 하지만 예수께서도 ‘좋은 사람 되는 공식’ 같은 걸 만들어 놓고 ‘나를 따르라’ 하신 건 아닙니다. “태생상 하나의 성소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르셨을 리 없습니다. 외려 우리가 ‘그럴 수 없음’의 존재라는 걸 다 아시고 부르신 거지요. 그러니 ‘왜 그리 믿음이 없느냐’는 말씀이 ‘넌 틀렸다’는 뜻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부른 거야’, 손 내미신 말씀인 거지요.
다락방은 보물을 숨겨 두는 곳이 아닙니다. 다락방은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 공간이지요. “심하게 먼지 나고 들어가기에 너무 비좁은, 몹시 높고 붉은 쪽문을 가진.” 그러니 다락방에서 소원을 성취한다는 건 '안 될 얘기’로 들립니다. '위대한 장소’가 ‘될 수 없는’ 이곳에 누가 소원을 심고 열매를 바란답니까. 그런데 “낡고 쓰다 버린 것”으로 가득한 그 “망가진 물건 사이에서” ‘거룩의 장소’를 만납니다. 어쩌면 ‘다락방’은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출애굽기 3장 5절)”이라 하신 ‘떨기나무’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도무지 쓰임을 알 수 없는” 것들의 시간과 공간에 서 만나는 영광 같은.
“…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이사야 40장 6절).” 이사야의 한 구절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광야는 다락방 같은 곳일까요. 쓸모 다한 것들로 쌓아 둔. 거기서는 물 한 모금의 안식조차 거두기 어려운. 그 광야에 길을 낸다면 그건 어떤 길일까 궁금했습니다. 비단 깔고 황금을 다져 광야에 길을 내면 그 길이 번쩍이는 ‘영광’일까. 지천이 마른 땅인데, 거기만 꽃길이어서 벌과 나비가 거기로만 모여드는 ‘구별’일까. ‘모든 육체’는 풀이고 ‘모든 인생’이 광야입니다. ‘여호와의 기운’은 거기 어디쯤 선을 그어 길을 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육체/인생’에 깃들어 길이 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장 8절).” 마른풀 시든 꽃을 쥐고 그 옛날 전도자의 ‘헛됨’을 노래해 왔던가요. 전도자가 ‘헛되다’ 한 것들과 ‘마른풀, 시든 꽃’이 겹쳐 보이는데, 그래서 광야가 새롭고 다락방이 눈에 선합니다. 삶이 헛된 것은 그게 ‘마른 풀, 시든 꽃’이어서라기보다 거기 깃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해서 아닐까요. “어느 다락방에 쌓인 낡은 몰락”, 그 좁은 틈을 찾아 들어와 ‘나다’ 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해서. 난처함이 반복되는 자기 확인의 자리가 유쾌해서가 아니라 거기로 찾아와 깃든 ‘기운’이 있어 시시함도 아름다움이 되더랍니다. 평강.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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