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칼럼

카이로스를 찾아서

길은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 ‘나’와 ‘너’를 이어줍니다. 인간은 그렇게 길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곳과 이곳을 만납니다. 길은 단순히 공간 이동을 위한 통로만이 아닙니다. 길은 ‘나’와 ‘너’의 나눔과 문화를 공유하게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랬듯이 이 땅의 길을 걸으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동행할 수 있다면 삶의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산티아고가 아니어도 존재의 의미를 더할 수 있다면 그 길을 함께 걸어보면 어떨까요?

시간을 허락받은 순간부터 인간은 그 시간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잠시 멈춘 채 숨을 고르고 싶어도 그렇다고 시간은 기다려주지는 않습니다. 시간은 잔혹하리만큼 냉정하게 자기 갈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시간 앞에서 덧없음을 한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 원망스러워 서럽다고 합니다. 하지만 같은 시간일지라도 어렸을 때는 왜 빨리 시간이 가지 않느냐고, 시간이 빨리 지나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교복과 학교 다니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를 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책임이 더 큰 압박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시간이건만 하루하루가 지치게 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결국 시간은 우리의 갈 길을 묵묵히, 그러나 한순간도 멈춰주지 않고 내 시간으로부터 차감해가고 있습니다. 원치 않더라도 멈춤이 없이, 가만히 있어도 주어진 시간을 소진시켜갑니다. 선심을 쓰는 것처럼 주어졌던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일정한 기간이 경과하면 소멸되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후 지나는 시간만큼 비례해서 에누리 없이 차감되어가고 있습니다. 남겨진 액수가 적어지면 비로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사용해야겠다고 급하게 서둡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짧아지는 만큼 그것을 제대로 쓰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사용하지 못한 포인트를 아쉬워하게 되고 말지요.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도 그런 것 같습니다. 1년이면 두 차례 며칠씩 제주도에서 정기적인 강의가 있어서 다닌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주행 첫 비행기 승객들 가운데 낯선 차림의 사람들이 탔습니다. 물론 지금은 자연스러운 광경이지만요. 가벼운 배낭과 스틱을 갖춘 올레꾼들입니다. 올레길을 걷기 위해서 가는 사람들이지요. 그중에는 첫 비행기로 제주도에 가서 종일 올레길을 걷고 저녁 늦은 비행기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올레길이 만들어진 후 걷기 열풍이 불면서 만들어진 현상이지요. 단지 걷기 위해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고 종일 걸은 후 그날로 돌아오는 일정의 올레길에는 무엇이 있기에 올레꾼들이 찾아드는 것일까요? 콘크리트 우리에 갇혀 살고 있는 도시인들이 잠시라도 자연에서 자유와 치유를 받기 위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걷기 열풍까지 더하니 그런 분위기가 제주도를 찾게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단지 걷는 것만으로 주어진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아쉽습니다. 걸으면서 육체의 건강을 챙길 수 있다면, 걷는 과정을 통해서 더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살면서 주어진 시간에 의미를 더할 수 있다면 삶의 의미와 질을 배가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올레꾼들은 단지 전 코스를 걸어보겠다는 목적으로 걷는 것 같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전 코스를 걷겠다는 목표로 시작하는 이도 보았습니다. 나름의 목표이니, 그것을 굳이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왕 걷는 시간을 만들었으니 그 시간에 의미를 더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곧 카이로스로서 시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로서의 의미화는 자신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과정입니다.

제주도 올레길 16코스는 다른 멋이 있습니다. 올레길이 대부분 바닷가를 끼고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코스는 유일하게 바닷가 고내포구(애월)에서 출발해서 중산간 지역까지 내륙으로 향한 길입니다. 그 도중에 장전리라고 하는 곳을 지납니다. 그곳엔 올레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걷고 있는 여정을 돌아볼 수 있는 멋스러운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 인기가 있는 코스가 아닌지 올레꾼들도 많이 찾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고내포구에서 시작하는 16코스 전체 길이가 16Km쯤 되는데, 그중 11Km를 지나는 즈음 잠시 올레길을 벗어나서 우측 마을로 들어서면 제주도 중산간 지역의 자연 마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 카이로스라고 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많은 건축물들이 주변의 환경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건물 자체에만 신경을 써서 마치 독불장군인 양 자기만 잘났다고 우뚝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꽤 잘났고, 품위가 있음에도 주변의 숲과 마을, 그리고 산자락에 잇대어 자연에 거슬리지 않게 둔덕을 그대로 이용해 앉아있습니다. 잘났다고 홀로 우뚝 서 있는 느낌이 아니면서도 멋과 품위가 넘치는 건물입니다. 주변의 자연환경에 잘 어울리면서도 존재감을 느끼도록 디자인한 공간입니다.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편안과 사유를 자연스럽게 제공합니다. 한쪽 벽을 완전히 통유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느 자리에 앉든지 멀리 제주도의 산간마을과 숲을 조망하기에 좋습니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사유하게 만듭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맹목적으로 걷는 것처럼 살아온 것은 아닌지, 잠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면서 자신의 삶과 발걸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올레꾼들은 이곳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냥 걷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리고 남들이 걸으니까 나도 걷는다면, 그 시간은 결코 카이로스로서 자신의 시간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올레길을 걷는 진정한 의미는 주어진 시간을 의미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굳이 카페 카이로스에서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이종전 교수 (개혁파신학연구소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