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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 ‘나’와 ‘너’를 이어줍니다. 인간은 그렇게 길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곳과 이곳을 만납니다. 길은 단순히 공간 이동을 위한 통로만이 아닙니다. 길은 ‘나’와 ‘너’의 나눔과 문화를 공유하게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랬듯이 이 땅의 길을 걸으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동행할 수 있다면 삶의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산티아고가 아니어도 존재의 의미를 더할 수 있다면 그 길을 함께 걸어보면 어떨까요?
골목길
어떤 길이든, 길은 다시 다음 어디론가 이어집니다. 물론 막다른 길도 없지 않습니다. 막다른 길이란 인간에 의해서 건축물들이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는 지리적, 환경적으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만들어집니다. 막다른 길은 들어갔던 길을 다시 돌아 나와야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골목에는 인간들이 함께하는 기쁨이 있고, 각각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가, 골목길이 더 정겹습니다. 사람이 함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은 언젠가부터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 도시를 리빌딩한다는 명분으로 긴 세월 속에서 만들어졌던 골목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골목길은 지켜내자는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골목길들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사라져갑니다. 분명히 있었던 골목길인데, 어느 날 전혀 새로운 도시가 되면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골목이 있던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근사하게 꾸며진 도로와 건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반듯하게 정리는 되지 않았지만, 어깨를 부대끼면서 홋홋한 골목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마 그들은 어디선가 방황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디서도 그렇게 사람 냄새나는 홋홋한 곳을 찾을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골목은 단순히 지나가는 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골목 자체가 삶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골목 안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은 변변한 마당도 없지만, 그곳에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과 인생을 일구어가는 기쁨을 맛보면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만나고, 이야기하고, 작지만 놀이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은 작든, 크든 광장이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지만, 우리네의 환경에서는 삶을 함께하는 기쁨이 나누어지는 곳은 골목입니다. 밀레가 찾아들었던 프랑스의 바르비종(Barbixon)이라는 작은 마을의 골목은 당대의 미술가들이 모여들어 명작을 남겼던 곳입니다. 가난한 예술인들이 농촌을 배경으로 배가 고프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능으로 바르비종의 리얼리즘을 화폭에 담아 불후의 명작들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가난했기에 더 아름다운 그림이 탄생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오직 자신의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또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작은 골목에서 만나 서로에게 격려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작은 마을의 골목길, 생각만 해도 기웃거리고 싶고, 가능하다면 살그머니 들어가 보고 싶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들과 사는 이야기와 나름의 깨달음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끔씩 찾아가는 골목이 있습니다. 찾을 때마다 걱정이 앞서지요. 그 골목마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돈만을 좇는 사람들이 골목마저 지배하게 된다면, 사라지는 것은 순간이겠지요. 아주 가끔이지만 부산의 보수동 고서점 골목을 찾습니다. 과거 청계천 고서점 거리를 생각하면 정말 작은 곳이지만, 아직 고서점의 명맥을 잇고 있는 골목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골목이기에 천천히 돌아보면서 오가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찾은 보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가 하면, 골목을 어슬렁거리노라면 고서점 주인장들의 경륜이 묻어나는 한마디가 들려오지요. 나름 책에 대한 일가견이 있고, 혹은 전문분야에 대한 매우 박학한 지식을 섭렵하고 있는 분들이 있지요. 하여, 찾고자 하는 책이나 저자에 대한 정보만 말해주면 일사천리로 엮어가는 것은 수십 년씩 한 분야에 집중해서 얻은 진정한 실력으로 쉽게 찾고자 하는 것을 손에 들려주지요. 몇 마디만 하면, 이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이야기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정말 찾던 책이거나,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책을 만나게 되어 손에 들려진다면, 그 기쁨은 배가 되는 셈이지요.
그렇게 고서점 골목을 빠져나오면 서점은 없지만 작은 골목은 이어집니다. 그 골목에 고즈넉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달리>라고 하는 명찰을 붙여놓고 있습니다. 골목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달리>는 고서점을 찾아 발품을 팔다 지친 사람들에게 쉼을 주는 조용한 곳입니다. 비록 테이블은 몇 개 되지 않지만 주인장인 젊은 바리스타는 커피와 문화, 삶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갖고, 찾는 이들을 위해서 커피를 내리고 있습니다. 크지 않은 공간에 시각적으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한 벽에 걸린 미술작품 한 점은 여백의 여유와 함께 쉼이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은은하게 스피커를 울리는 음악은 커피의 향과 함께 피로까지도 회복시켜 줍니다. 시끄럽지 않은 조용한 나만의 쉼과 커피로 회복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달리>는 내게 있어서 부산을 찾을 때면 꼭 들러야 하는 곳입니다.
이종전 교수 (대한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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