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화칼럼

길은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 ‘나’와 ‘너’를 이어줍니다. 인간은 그렇게 길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곳과 이곳을 만납니다. 길은 단순히 공간 이동을 위한 통로만이 아닙니다. 길은 ‘나’와 ‘너’의 나눔과 문화를 공유하게 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랬듯이 이 땅의 길을 걸으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동행할 수 있다면 삶의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산티아고가 아니어도 존재의 의미를 더할 수 있다면 그 길을 함께 걸어보면 어떨까요?

미곡창고

최근 국내 여행의 맛을 느끼고 체험하기에 좋은 곳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 있습니다. 군산입니다. 군산은 근대역사와 문화, 그리고 여러 가지 맛있는 먹을거리, 문학관들까지 관심을 두는 것을 주제로 여행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입니다. 군산 주변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을 쓴 작가들도 많아서 그들의 작품과 생애를 찾아보는 여정도 여행의 맛과 멋을 더하는 곳입니다.

군산에 조성된 걸을 수 있는 길은 <군산구불길>입니다. 조금은 낯선 이름이지만 군산을 돌아볼 수 있는다양한 코스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같이 걷고 싶은 곳은 구불길 E코스입니다. 그리고 E코스에서는 멋진 쉼터와 함께 역사와 문화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기에 기꺼이 소개하고 싶습니다. 구불길 E코스는 군산에서 가장 유명하고, 군산을 눈과 마음으로 담을 수 있는 월명공원(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됩니다. 전체 거리는 12Km인데, 출발해서부터 해망굴, 해신동주민센터, 수덕공원,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근대미술관, 그리고 군산항으로 이어지는 길은 군산의 근대현대사를 모두 경험하면서 걸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길은 구암3.1로입니다. 여기부터는 잠둑마을을 지나 진포시비공원까지가 구불길 E코스의 종점입니다. 하여, 구암3.1로에 접어들어서 잠둑마을 방향(금강변길)으로 가지 말고, 그냥 구암3.1로를 따라서 직진하면서 작은 동산이 왼편에 보입니다. 이 길은 사실 군산에서 익산으로 가는 옛길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부터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길을 만나기까지는 좁은 왕복 2차선으로 옛길의 정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길 양편에 남겨진 옛집들이나 간판들은 참 정겨웠지요. 지금은 아주 짧은 일부 구간에 조금 남겨져 있어서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낡은 간판이나 지붕, 담벼락, 그리고 예스러운 표현들이 담긴 글씨들이 낯설 만큼 늦게 가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낮은 동산(구암동산), 그곳은 해발 34m 높이의 작은 언덕이지만 현재는 군산역사공원으로 꾸며지고 있습니다. 거의 완성단계에 있기에 걷는 사람이든, 차를 이용해서든 찾아보면서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이 군산역사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강점기 때, 즉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군산은 한강 이남지역에 최초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 운동을 준비하고, 출발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공원이 조성된 곳은 선교사들(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거점(station)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살던 집과 학교, 병원(군산예수병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여기에 있던 학교의 학생들과 선교병원의 직원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구암교회의 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따라서 이 동산은 군산의 3.1독립만세운동의 본산인 셈입니다. 여기까지 이어지는 도로명이 구암3.1로라고 만든 것도 이곳이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역사공원 제일 위에는 선교사들이 세웠던 학교건물을 복원해서 청소년들의 역사체험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동산에 올라서면 멀리 군산항과 구도심이 보입니다. 또한 금강하구와 건너편 장항까지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입니다. 저녁나절이면 석양의 노을과 금강하구가 만들어주는 정경은 독특한 곳이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구암동산에 올라서 초기 내한해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족적을 찾아보는 것과 함께 우리의 근대역사를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여행자에게는 기쁨을 더할 것입니다.

동산에서 내려와 다시 구암3.1로에서 익산방향으로 불과 2~3백 미터를 걷노라면, 그 과정에서 옛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즈음에 왼편에 오래된 농협창고가 보입니다. 오늘 쉼터는 바로 그곳입니다. 이곳을 찾을 때 언제나 그곳에 창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창고가 변신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모습이나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용도가 바뀌었습니다. 농협이 사용하던 창고를 이름조차 바꾸지 않고, 그대로 미곡창고(米穀倉庫)라는 간판을 달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창고가 아닌 카페입니다. 넓고 높은 공간을 그대로, 아주 조금만 인테리어를 해서 카피를 즐길 수 있고 음악 감상, 미술 전시까지 할 수 있는 소박한 공간으로 바꿨습니다. 주인장은 인테리어를 최소화하면서도 공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외벽도 손을 거의 보지 않고, 농협 마크나 창고라는 글씨까지 지우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카페로 개조했습니다.

주인장의 감각과 의식이 창고를 이용함으로 낙후되고 버려진 듯한 주변 환경을 개선하여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남다른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커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커피 유학을 통해서 먼저 커피 공부를 했고, 돌아와서는 커피를 통해서 지역사회의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가는 의식이 있는 주인장입니다. 도시 외곽에 낙후한 농촌 지역으로 소외된 이곳을 기존의 시설을 이용한 커피공방을 만듦으로써 주인장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 되었습니다.

넓은 공간을 이용하니 잠시 쉬는 나그네들도 한결 여유롭게 합니다. 주인장의 커피에 대한 자만(自慢)은 박수를 받을 만 하구요. 군산의 미래를 이끌고 있는 주인장과 함께 한 잔의 커피를 나눌 수 있는 여유도 허락받을 수 있었기에 기억에 특별히 남는 곳입니다.


이종전 교수 (대한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