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화가 친구
Ⅰ. 생각해 본다
네이버에 ‘내 서재’라는 항목이 사라졌을 때 참 아쉬웠습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부담 없이 넣어두고 가끔 제목만 둘러봐도 흐뭇했으며, 값이 비싼 전집이나 두꺼운 책들도 돈 생기면 사야지 하면서 내 것처럼 모아 두곤 했습니다. 구입해서 읽은 책들을 목록에서 지워나가는 재미도 있었지요. 거기엔 선물하고 싶은 책들과 선물 받고 싶은 책들도 있었습니다. 그림이 주가 되는 책들은 정말 갖고 싶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늘 망설이다 오래오래 그곳에 머물러 있곤 했습니다. 지난겨울 경복궁 근처 자하문로에 있는 ‘역사책방’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교회 친구 부부와 만나 밥 먹고, 달콤한 디저트를 사고, 동네 구경을 하던 중이었지요.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이었습니다. ‘내 서재’에 오랫동안 모셔두기만 했던 바로 그 책. 친구는 책방으로 안내하며 맘에 드는 책을 하나 고르면 선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솟아오르기 전에 귀한 책을 얼른 집어 친구에게 주고는 다짐하기를 정말 열심히 보고 읽어야지 그래야지, 다 읽으면 칼럼에 꼭 소개해야지, 했습니다. 여기서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Ⅱ. 감상해 본다
이 귀하고 아름다운 책은 화집이라고만 하기에는 좋은 글이 많아서 보는 재미뿐 아니라 읽는 재미 또한 진진합니다.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는 스코틀랜드 애버딘셔 출신으로 부모의 도움 없이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고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동양 나라(일본,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고, 한국에는 삼일운동 직후 여동생 엘스펫과 함께 들어옵니다. 엘스펫은 여행하며 글을 썼고 남편과 일본에 거주하면서 언니의 충실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수채화와 유화를 그렸는데, 일본에서 목판화를 배우고 활발히 활동하여 판화가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풍경을 담은 목판화를 보면 일본풍이 아닌 그만의 독특한 색채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 지배하에 놓인 나라였지만, 화가는 한국산천의 인상적인 풍경과 한국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정신을 담은 작품들로 한국에 대한 자신의 깊은 애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원산>이라는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에, 올해 설 특집으로 방영된 다큐, ‘두 도시 이야기-속초, 원산’을 찾아보았습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원산 바다와 산과 들이 주는 분위기는 그대로인 것 같았습니다. 이 푸른 채색 목판화 아래에 화가가 직접 쓴 감상 글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Ⅲ. 읽어 본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자신이 일제 치하에 놓인 한국을 사랑한 진정한 친구였음을 그림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책의 머리말을 읽어보면 정확하고 애정 어린 시선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만들어졌다. 전 세계가 이미 참혹한 일들을 많이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미지의 작은 나라에 세상의 따뜻한 눈길이 머물 수 있도록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림들을 널리 보여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동생 엘스펫과 함께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19년 3월이었다. 당시는 삼일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여서 한국은 깊은 비극에 휩싸여 있었다. 수천 명에 달하는 한국의 애국자들이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있었고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도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그들은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그저 줄지어 행진하면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외쳤을 뿐인데도 그런 심한 고통과 구속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많은 한국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얼굴에 그들의 생각이나 아픔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내가 스케치한 어느 양갓집 부인은 감옥에 들어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도 일본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전혀 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강인한 성품을 잘 알게 되었고 또 존경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간사한 농간 탓에 조국을 잃었고 황후마저 암살당했으며, 그들 고유의 복장을 입지 못하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나는 길을 가다가 한국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 옷에 검은 잉크가 마구 뿌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 경찰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말살시키려고 흰옷 입은 한국인들에게 그런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생각이 부족한 일본 사람들은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자국에서의 악질적인 선전 때문에 한국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열린 마음을 가진 일본인들은 한국의 문화와 그 미술을 존경하고 심지어 숭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국의 역사가 일본의 역사보다 더 오래 되었고 또 한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호경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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