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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성소
형, 기억 나? 초등학교 입학한 뒤 형과 단 둘이 시꺼먼 먹물 난닝구에 묻어나는 교복 입고 처음 외갓집 가던 길. 신새벽 아버지가 건네준 삶은 달걀을 버스가 출발하기 전 목메도록 먹고 창문으로 밀어닥치는 먼지바람에도 두리번거림 무서워 오금 저리던 길.
새벽부터 달리던 주둥이 튀어나온 버스는 결국 자갈길 위에서 투덜대더니 엉덩이 까고 강가에 퍼질러 앉아버렸지.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솥단지 걸고 천렵을 했지. 길가 미루나무에서 매미들 미친 듯 울고, 솥단지 하나 물가에 걸고 어떤 사람은 투망으로 여름을 건져 올리고, 어떤 사람은 모래밭에 심어놓은 푸성귀 뜯어 와서는, 여드름 잔뜩 돋아난 터벅머리 조수가 퍼질러 앉은 버스 뜯어 고치는 동안 호박과 뒤엉켜서 끓어오르던 솥단지. 누군가 쌀자루에서 한줌 쌀알을 꺼내고 어떤 사람은 국수 꺼내 한솥 가득 끓여내던 점심. 날은 타올라 강가에 모래알도 노랗게 달아오르고 언제 떠날지 모른 채 끓여 먹던 어죽. 입안 가득 생선가시 같은 가난들 고이고 비포장된 인심들 모여 벌였던 잔칫집 같았던 천렵.
1965년 영동에서 보은으로 가던 보청천. 강가에 버드나무들 국수발 같은 머리칼 물위에 드리우고 우리는 한 마리 버들치가 되어 그 속을 헤엄치고 다녔지. 그 한없이 목덜미를 검게 물들이던 검은 먹물로 만든 학생복 입고 외갓집 가던 날. 기억 나, 형?
- 박기영 <어죽국수>
충청남도 예산에서 나고 자란 가까운 친구가 셋 있습니다. 친구들이 살던 예산에는 이름난 저수지가 있어요. 예산과 당진을 잇는 아주 큰 저수지라고-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저수지라고, 친구들은 ‘완장’찬 저수지 관리인처럼 자랑했습니다. 그 저수지 이름이 ‘예당저수지’라는데 저수지가 하도 커서 ‘예당호수’로 부르기도 한다고. 거들먹처럼 보이는 친구들의 자랑이 밉거나 우습지 않았더라지요. “그래? 한번 가봐야겠네.” 고수 북 치듯 추임새를 얹었더니, 예당저수지 어죽이 죽인다면서 꼭 한번 오래요. 그렇게 기약 없는 약속이 만들어졌는데, 그 막연한 약속을 이루는 데 삼십 년 걸렸더랍니다.
친구 아버님의 소천 소식이 전해지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지요. 장례가 있던 사흘. 모여 앉은 친구들의 네모진 밥상에는 ‘지난날’ 말찬(饌)이 끊이질 않더랍니다. 그러다 문득 ‘그때’를 떠올렸어요. 삼십 년 전 어스름했던 약속이 어제저녁 두고 온 물건처럼 또렷해지더랍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자’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요. 한걸음에 달려가서 저수지가 한걸음에 닿을 어죽 식당에 다시 상을 차렸답니다. 어딜 가면 현지인 맛집이 최고지요. 예당 어죽을 왜 그렇게 떠들며 자랑했는지를 알겠는 맛. 본디 민물 생선을 즐기지 않는 제 입에도 쩍쩍 감겨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게 눈 감추듯 비워낸 밥상이겠는데, 그 오래 묵은 밥상 위로 아무리 퍼먹어도 줄지 않는 추억의 밥그릇이 돌아다니더랍니다. 꼬리를 무는 기억과 그 기억에 담긴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 따지자면 ‘난닝구에 묻어난 시꺼먼 먹물 같은’, “입안 가득 생선 가시 같은 가난”한 이야기들. 그게 뭐 그리 대단하고 재미있었을까요. 지금은 채로 곱게 거른 어죽 그릇 앞에 앉았지만, 그땐 그럴 겨를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한 그릇에 돈 만 원 하는 어죽 값. 여기 전부 얼마냐고 호기롭게 주머니에서 밥값을 꺼내 들 형편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이에 끼고 목에 걸리고, 얼마나 성가신 맛이고 수고로운 날들이었던가요.
그래서였을까요. 박기영의 <어죽국수>를 읽으며 뭉클했던 마음. 잠깐 고여 찡하던 눈물. ‘기억’은 이를테면 ‘성소’와 같은 것일까요. 가시 같고 송곳 같기도 했던 날들. 여기 내 손바닥을 만져보라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환히 웃으며 내밀 수 있는 기억의 성소.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라고, 많이 아팠다고, 그런데 괜찮다고, 다 나았다고, 새 살이 돋고 거기 피가 흐르고 있다고 내미는 흔적. 그렇게 기억은 모진 ‘오늘’의 칼을 막는 방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웠던 지난 추억들 사랑했었던 모든 사람”의 ‘기억’으로 ‘말없이 그 길을 가겠노라’는 노래 한 소절이 새롭습니다. 평강.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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