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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일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25-01-31 (금) 15:38 조회 : 496
‘모르는 것’으로 배우는 믿음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너 자신을 알라’며 ‘무지(無知)’의 ‘지(知)’를 고백했던 철학자가 있었다지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석학이며 지혜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훌륭함을 들어 ‘4대 성인’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지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람. 그런 사람이 뭐가 그렇게 훌륭했을까요. 그런 사람을 뭘 그렇게 훌륭하다 하는 걸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건 무지이고 어리석음입니다. 그걸 자랑할 건 아니지요. ‘자랑’은 ‘안다’의 주춧돌 위에 세워지는 깃발입니다. ‘모른다’는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웅덩이를 파지요. 그 웅덩이에서 ‘성찰’의 물을 길어 마십니다.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게 생수가 되고 우물이 되고 생명이 되는 거지요.



뭘 많이 알고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쥐뿔도 모르는 게 많습니다. 이를테면 ‘공부’가 그래요. 대체 얼마만큼 공부를 하면 ‘안다’ 할 수 있는 걸까요. 공부란 게 한도 끝도 없는 것이어서 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을 세상으로 빠져듭니다. 박사들은 알 겁니다. 박사학위 한 장에 달린 그 좁고 박한 ‘아는 것’의 세상을. 그러니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에서 몇 글자 검색어로 다 알 수 있는 공부가 아닌 거지요. 똑똑한 기계가 외려 멍청한 사람을 만들어요. 기계가 알려 주는 정보가 ‘전부’인줄 알아서 기계 믿고 영리한 척을 하면 이내 무식이 탄로 난다니까요. 가을 가을한 하늘에 가슴에 뻥 뚫리고 형형색색 옷 입은 계절을 바라보며 탄성이 나는 건 ‘알아서’가 아니라 ‘잘 몰라서’ 일 겁니다.



그중 잘 모르겠는 게 ‘사는 일’ 아닐까 싶어요. 산다는 건 어떤 공식과 법칙으로 딱 떨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공부를 다 쓸모없다 할 순 없지만, 공부로 다 알 수 있는 인생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을 지 몰라요. “배배배 배신이야, 배신!” 영화 속 유명한 대사처럼 ‘인생’은 ‘배신’의 골목을 지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오죽하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했을까요. 다만 그 골목에 배신의 첨병(尖兵)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몰랐던 겁니다. 배신의 수색과 경계에 노출된 인생, 당할 재간이 없지요. 몰라서 당하고, 때로는 안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꼼짝없이 당하거든요. 딱하지만, 산다는 게 그래요.



“그런 어느 밤이었을”겁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흔들리던 ‘갈대’가 뭘 하나 “알았”답니다. 자기를 흔드는 게 “바람도 달빛도 아”니라는 걸. 바람은 가깝고 달빛은 먼데, 바람은 가까워서 눈물 나고 달빛은 너무 멀어서 슬픕니다. 칼날의 서슬처럼 휑하게 불어 대는 바람 때문에 울고, 내 눈물과 너무 먼 저 달빛의 아름다움에 다시 통곡을 하지요. 그러다 그 울음이 ‘바람’과 ‘달빛’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 때문이었다는 걸. 산다는 게 실은 “속으로 이렇게 / 종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걸 “그는 몰랐”습니다. 그래요. ‘그는’ 그가 ‘몰랐다는 걸’ 이제 ‘알았습니다.’ 아, ‘아는 것’으로가 아니라 ‘모르는 것’으로 배우는 믿음도 있는가 봅니다.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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