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집’ 짓고 살라고
“버스를 기다려 본 사람은 / 주변의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기억한다 / 그런 사람들은 시골 차부의 / 유리창에 붙어 있는 세월의 빗물에 젖어 / 누렇게 빛이 바랜 버스 운행 시간표를 안다 / 때가 꼬질꼬질한 버스 좌석 덮개에다 / 자기의 호출 번호를 적어놓고 / 애인을 구하고 싶어 하는 소년들의 풋내 나는 마음도 안다 / 그런 사람은 저물 무렵 주변의 나무들이 밤을 맞기 위해 / 어떤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는지도 / 낮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 저녁연기가 어떻게 마을을 감싸는지도 안다 / 그리고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버스는 / 천천히 오거나 늦는다는 것도 안다 / 하찮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 분명 가슴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 안도현 <그 작고 하찮은 것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영화 제목 같은 날 밤이었습니다. 밤하늘이 파랗고, 삼경이나 사경쯤의 동산도 환하더랍니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아침보다 찬란하고 대낮보다 뜨거웠던 그날 밤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너무 좋은 마음은 감출 수가 없어서 ‘여기’에 ‘집’을 짓자는 말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환상과 신비. 어디서도 겪어보지 못했던 황홀경을 ‘여기’ 두고 어디다 집을 짓고 산단 말입니까. ‘아니라’고 ‘집’ 지으러 ‘여기’ 온 게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십니다. ‘내려가자’고 ‘거기’서 지을 ‘집’이 있노라고, 주저앉은 엉덩이를 일으키십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누가복음 9장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리라(누가복음 9장 22절)”는 걸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는 것’은 ‘여기’에 ‘집’ 짓는 게 아니라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누가복음 9장 23절)” 따르는 길. ‘집’은 ‘거기’에 짓는 거라고. 그날 밤 그 좋았던 동산에서 들린 하늘의 음성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누가복음 9장 35절)”는 것이었지만, 이미 ‘다른 집’에 마음 둔 이들에게는 ‘하늘 음성’도 소용이 없었던가 봅니다. 제자들은 말이 없었습니다(누가복음 9장 36절 참조). 날이 밝았고 쪼르르 스승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산 아래 남겨진 제자들. 그들은 ‘거기’서 어떤 집을 짓고 싶었을까요, 어떤 집을 짓고 있었을까요.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누가복음 9장 38절).” 산 아래의 ‘집’은 소란스럽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는 것처럼 사연 없는 집이 없습니다. 아비의 사연은 절절했는데 제자들은 그 소란을 잠재울 ‘집’을 짓지 못했습니다. 귀신을 꾸짖어 아이를 낫게 하시자 ‘소란’이 ‘놀람’이 됩니다. 그 놀란 집 마당 한 가운데로 던져두신 한 말씀.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누가복음 9장 44절 a).” 황홀경에 정신 팔렸던 ‘산 위의 제자들’과 이 놀라운 일에 정신을 빼앗긴 산 아래 제자들이 다르지 않습니다. 엄한 ‘집’을 짓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지을 ‘집’을 다시 일러주십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누가복음 9장 44절 b).”
‘놀라운 일’이 아니라 ‘놀라운 말씀’에 반응했어야 합니다. ‘그 일’이 아니라 ‘이 말’을 담아 두었어야 합니다. ‘이 말’을 담아두지 못한 ‘그 일’이 엄한 집을 짓습니다. ‘누가 크냐’는 다툼(누가복음 9장 46절)이 공연히 생긴 게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으려는 ‘큰 집’을 무너뜨리시며 당신이 지으시려는 ‘작은 집’의 기초를 놓습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누가복음 9장 48절).” ‘큰 집’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마태복음 20장 25절)” 짓는 것이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느니라(마태복음 20장 26절)”고.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섬기는 일’ 잘하는 자가 ‘큰 자’라는 게 아니라 ‘섬길 수밖에 없는’ 하찮은 자가 크다는 말씀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던 시인이 ‘하찮은 것’을 다시 노래했습니다. 무릇 사람살이라는게 “주변의 아주 보잘것없는 것들을 기억”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신앙의 옷을 입지 않더라도 그 정도쯤 헤아리고 살아야 ‘사람 사는 것’이지요. ‘사람 사는 세상’에는 그 정도쯤의 온기가 서려야 하고, 그 정도만큼의 꽃은 피어야 합니다. “낮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한 ‘집’에 ‘하나님 나라가’ 있어서, 예수께서는 이 낮고 하찮은 자리로 오셨나 봅니다. 기어이 더 낮고 더 하찮은 자리로 가시려나 봅니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더디고 느려도 ‘그 집’ 짓고 살라고 다시 아침입니다. 평강.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