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CH 정기구독
정기후원
   

[칼럼] 주일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25-08-05 (화) 00:21 조회 : 276
‘그렇고 그런 날’의 동경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φοβ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니코스 카잔 자키스의 묘비에 적어 둔 문장이라지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보여 주고 싶었던 그것. ‘바라는 것’에 ‘매임’이 있습니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을 겁니다. ‘두려움’이 ‘매임’ 되기도 합니다. 아픔이나 가난, 그 어떤 모욕이나 수치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매일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롭다”고, 죽음의 강을 건너며 적어둠직한 말이 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조르바’이고 싶었을 때가 있지 않았을까요. 바라지만 닿을 수 없을 때. 아름답지만 이를 수 없을 때. 닿을 수 없고 이를 수 없는 그것을 사람들은 동경합니다. 동경이 해결은 아니지만, 동경만으로도 위로를 얻거나, 그렇게라도 창을 열지 않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서였을까요. ‘그리스인 조르바’에 열광한 게 그런 까닭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덤/죽음’조차 자유로울 수 없었던 카잔자키스. ‘거룩한’ 종교인들이 ‘거북한’ 자물쇠로 그의 ‘무덤/죽음’까지 가둬두려 했다는데, 대체 누가 누굴 가둔건지 모르겠습니다.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은 카잔자키스의 대표적인 문제작으로 알려졌지요. 작가적 상상력과 통찰로 빚어낸 빼어난 작품이지만, ‘경건한’ 종교인들에게는 위험한 문서고 책 감옥 서고에 가둬야 할 금서였던 모양입니다. 카잔자키스는 ‘교회’의 우물에 독약을 빠트린 인물이었고, 독이 우물에 퍼지기 전에 서둘러 건져내야 할 ‘유혹’이었습니다. ‘유혹’을 건져내느라 숨 막히게 헐떡였을 종교의 우물. ‘자기들의 우물’ 밖을 유혹으로만 알았던 우물 안 개구리들의 세상. 진리는 그들의 세상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카잔자키스의 ‘상상’과 통찰에 의하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최후의 유혹’을 받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태복음 27장 42절).’ 더없이 달콤한 유혹. 군병들의 창에 찔린 예수가 십자가에서 정신을 잃는데, 눈을 떠보니 달라진 세상입니다. 남들처럼 결혼하고, 남들처럼 아이를 낳고, 목수로 돌아가 남들처럼 평범한 아침을 맞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평범한 저녁 밥상에 앉아 공손한 밥을 먹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날의 일상. 예수, 최후의 유혹은 ‘평범한 날의 행복’입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십자가. 끝내 예수께서 그 십자가를 지십니다.



마귀는 삼지창 들고 뿔 달린 모습으로 유혹하는 법이 없어요. 십중팔구 유혹은 내적 충동으로 찾아옵니다. ‘돌로 빵이 되게하라’는 귓전의 유혹보다 ‘돌로 빵을 만들고 싶은’ 가슴팍 충동이 먼저인 거지요. 예수 최후의 유혹이 ‘그날이 그날 같은’ “그렇고 그런 날”에 대한 내적 동경이었을 거라는 카잔자키스의 상상.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욥기 7장 4절).” 평범한 한 끼의 ‘잠’을 바라는 우리의 ‘상상’이 허툰 건 아닐 겁니다. 평강.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foot_이미지
개인정보취급방침 이용약관 이메일무단수집거부